저는 요즘 플레이스테이션5(PS5) 성능에 어울리지 않는 일본 고전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일상침투 리얼호러 이은날'인데요. 그 뜻을 알면 싼 티 나는 그래픽이 갑자기 무서워 보입니다.
인류가 번영해 건물이 난립하자 영물의 영역이 희미해졌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됐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찾아와야 할 '다음날'은 영의 힘으로 '이은날'로 왜곡됩니다.
이은날의 한 장면. 학생의 등에 귀신이 붙었다.
(이미지=닌텐도)
공포 게임 하면 '사일런트 힐'이나 '바이오 하자드'를 떠올릴 분이 적지 않을 텐데요. 이 게임은 아무런 액션도 없는 데다, 눌러야 할 버튼 중 열에 아홉이 왼쪽 방향키뿐입니다.
가끔 주인공이 위를 올려보거나 대사를 넘길 땐 위쪽 방향키나 X를 눌러야 합니다.
게이머는 왼쪽 방향키만 누르거나 L 스틱을 기울여 캐릭터를 왼쪽 끝으로 이동시키면 다음 날을 맞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여학생이 전철에서 왼쪽 끝으로 가 역에서 내리면 다음 날 전철 장면이 반복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음날, 또 다음날이 이어질수록 주인공 주변이 괴기스럽게 변질됩니다.
좌석에 앉은 승객이 침울해하다 옆을 달리는 전철에서 귀신으로 나타나고, 각종 시설물이 부식되며 점차 지옥처럼 변해가는 겁니다.
주인공은 이 변화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이은날이 오게 됩니다.
이날이 오면 주인공이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게이머는 계속 왼쪽 방향키를 눌러 결말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 게임에 그려진 각종 장식이나 인물 그림을 따로 보면 그리 무섭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분 나쁜 한숨과 울먹임을 들어가며 왼쪽 방향키를 누를 때의 찝찝함이 화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자기 전에 이은날을 잠깐씩 하고 자다 보니, 지난 주말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기도 했는데요. 제작자 아임시안(ImCyan)이 게임에 새긴 문구 "여러분의 불행을 바랍니다"가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소름 돋았습니다.
5800원 주고 산 게임의 콘텐츠가 지나치게 풍성합니다.
이런 매력(?) 때문인지, 이은날은 조금씩 이야기를 보태가며 1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기획력으로 경쟁하면 소규모 작품도 장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도 기발한 게임이 가끔 나오지만, 대중의 눈에 쉽게 띄고 오래 가는 작품은 드뭅니다.
하지만 한국 게임 업계의 현실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게임물관리위원회 등급 분류를 맡은 심의위원의 성향과 기분이 심의 결과를 좌우하는 국가 사전 검열 제도가 우선 바뀌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