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무는 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2024년은 일모도원의 해였다.
본격 만개한 AI 시대를 맞아 시장 선점을 위한 패권 경쟁은 그 어느해보다 치열했다.
자국 산업 보호 기조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된 해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느닷없이 터진 12·3 내란사태는 한국사회의 갈 길을 더 멀게 만든 최악의 '뻘짓'이었다.
삼성전자를 대표로 한 반도체 업계는 올해 큰 파고를 겪었다.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이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 급증으로 이어졌지만, 삼성전자는 AI 핵심 부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에 대한 오판으로 위기를 맞았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최대 구매자인 엔비디아에 안정적인 공급을 이어가며 성장하는 등 희비가 엇갈렸다.
2025년 ‘HBM 왕좌’ 타이틀을 두고 양사가 각각 ‘위기 극복’과 ‘1위 수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두 회사의 차세대 HBM4 시장 선점을 위한 사활을 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사업 전반으로 눈을 돌리면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업체의 빠른 추격으로 레거시 메모리 시황이 악화하고 있는 탓에 HBM 시장에서 밀릴 경우 반도체 산업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깃든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내란 사태는 ‘불확실성’이라는 거대한 상흔만 남겼다.
탄핵 소용돌이에 모든 이슈가 빨려 들어가고 일종의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국내 산업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콘트럴 타워조차도 없는 실정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자국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오늘, 한국은 시대착오적인 내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경쟁력 약화는 시간문제다.
배터리 업계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올해 배터리 업계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과 중국 기업의 공세에 흔들렸다.
업계는 포트폴리오와 폼팩터를 다양화하는 등 경쟁력 회복을 위해 부심하고 있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보조금 축소 가능성 등 정책 변화는 잠재적 위협으로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위축 등의 요인으로 정유·화학 업계도 불황의 한 해를 보냈다.
정유·화학 업계는 생존을 위해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고부가 제품 개발에 집중하는 등 활로를 찾고 있지만, 계엄 여파로 급등한 고환율에 따른 원가 부담과 트럼프 2기 예고된 고관세 정책은 올해 사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처럼 올해 국내 산업은 전반적으로 힘겨운 경쟁을 이어왔다.
용산은 자신들이 벌인 ‘친위 쿠데타’가 얼마나 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았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엎친 데 불황, 덮친 데 계엄이라니. 한국 경제 곳곳에서 위기의 경고등이 명멸하고 있다.
하지만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아무리 어두워도 결국 해는 뜨기 마련이다.
어두운 새밑 새벽, 첫 해를 기다리며 ‘한강의 기적’을 생각한다.
새로운 기적의 해, 2025년이 오고 있다.
배덕훈 재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