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기자] "북위 34도에서 35도 사이, 일본의 약간 위쪽, 중국 해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코레(Core)라 불리는 또 다른 큰 섬이 있다.
"
네덜란드 무역상인이자, 여행가인 얀 하위헌 판 린스호턴의 동인도 항해일지에는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조선'을 이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 열강은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더 먼 바다로 나갔고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통상 요구는 대한제국 역사의 개항기로 지목됩니다.
서양 선박들이 조선 근해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후반. 선조들은 이상하게 생긴 서양의 배를 '이양선'이라 불렸습니다.
열강의 함대는 통상 요구에만 그치지 않고 조선의 영토에 침입해 군사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지난 11일 수도권 최초 국립 해양문화시설인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개관식을 진행, 운영에 들어갔다.
(사진=뉴스토마토)
고종 12년,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본의 운요호 사건은 통상 수교거부 정책으로 대응하던 조선 수교의 문호를 열게 한 '을해왜요'로 불립니다.
조선침략의 서막은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강제한 인천의 해양 역사와 궤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뉴스토마토>가 수도권 유일의 해양박물관이 들어선 인천을 찾았을 때는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해양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관문이 된 인천항은 일본에 의해 수탈당한 만행의 역사와 근대의 물결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일본은 1876년 2월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강제한 후 침략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의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인천은 수도 한성의 외항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사실상 조선의 관문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굳게 닫힌 조선 관문이 열린 1883년 1월 뼈아픈 해양 역사를 고증합니다.
'어을미도' 그리고 인류의 '해양 역사'
디스코팡팡 등 대표적 놀거리가 있는 월미도에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들어선 배경은 개항의 역사와 무관치 않습니다.
1655년 '승정원일기'에 표기된 어을미도는 월미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바닷물이 섬을 타고 돌면서 섞이는 섬을 의미합니다.
개항 당시 제물포는 조수산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넓어 큰 배를 접안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물포 앞의 작은 섬 월미도는 만조 시 대형 선박의 입출항이 가능해 1918년 제물포 갑문이 설치되기 전까지 외국증기선들이 정박한 곳입니다.
증기선에 필요한 석탄 저장 시설이 들어서는 등 개항 후 각국 선박들이 한데 모이는 요충지가 됐습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어로활동을 하는 등 바닷가와 물길을 터 잡아 살아왔습니다.
전국 해안가에 분포하고 있는 조개무덤 등의 선사 유적을 통해 바다와 삶의 터전을 확인할 수 있고 해양문화의 계승은 바다를 건너 전파될 만큼, 때려야 땔 수 없는 인류의 보고입니다.
일본 해안 지역에서 출토된 한반도 계통의 선사 시대 유물들은 바다를 통한 교류의 흔적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가야는 건국 이래 서로 대립하거나 연합했고 중국·일본과의 갈등 관계 속에 성장해왔습니다.
삼국과 가야는 대외관계에 따라 바다를 통해 수군을 일으켰고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 친교를 맺는 등 선진 문물도 해양 역사의 한 획으로 지목됩니다.
또 삼국지에는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담겨 있는데, 주요 거점으로 변한 소국인 구야국을 알리고 있습니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했던 구야국은 남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중국 대륙 등을 잇는 삼한 해상교역의 단면입니다.
조선술·항해술의 발달로 보다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게 된 남북국 시대는 발해 무왕 때 서해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서 우수한 우리 수군의 운영 능력을 펼쳤습니다.
동양과 서양은 해양 실크로드로 연결됐고 신라의 청해진을 대표적 국제 교역항으로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축이 됐습니다.
지난 11일 수도권 최초 국립 해양문화시설인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개관식을 진행, 운영에 들어갔다.
(사진=뉴스토마토)
문순득 '표류기'…해양 중요성 계기
아울러 조선 후기 홍어 장수인 문순득이 바다를 표류하다 경험한 해외 여정 표류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802년 현 대흑산도 인근에서 표류해 오키나아와 필리핀 마카오를 거쳐 약 3년여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 일기는 19세기 초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구문화를 체험하는 등 이전의 표류인들과 큰 차별점을 두고 있습니다.
문순득이 표류기간 머물던 국제적 무역항들의 경험은 정약용, 정약전, 이강회 같은 실학자에게 전파됐다는 게 국립인천해양박물관 측의 설명입니다.
우동식 국립인천해양박물관장은 "정약용은 '경세유표', '사대고례'에 구체적으로 기록했으며 이강회는 문순득의 경험을 토대로 국내외 선박과 항해문화를 비교한 '운곡선설'을 집필했다"며 "정약용과 이강회를 통해 전파된 문순득의 표류 경험은 해양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이강회는 문순득의 사례를 통해 해양에 대한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됐고 선박에 대한 관심이 국가적 안위와 연결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실학자들에게 해상무역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줬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한정된 세계관이 당시 동남아 지역에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을 경험한 문순득의 이야기를 통해 서양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우 관장은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순득 일기'는 문순득의 표류 경험을 옮겨 적은 것으로 작성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아 현재 이를 밝히기 위한 조사연구 사업이 진행 중"이라며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전문가 평가에 따라 향후 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행정 절차를 추진하고자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동식 국립인천해양박물관장은 11일 인천 중구 월미도에서 열린 '국립인천해양박물관 개관식' 개회사를 통해 "해양도시 인천에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문을 열게 됨으로써 수도권 주민들도 해양문화와 유물을 가까이 직접 보고 경험하며 바다의 소중함을 느끼실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사진=국립인천해양박물관)
인천=이규하 기자 judi@etomato.com
newstomato.com | 이규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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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무역상인이자, 여행가인 얀 하위헌 판 린스호턴의 동인도 항해일지에는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조선'을 이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 열강은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더 먼 바다로 나갔고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통상 요구는 대한제국 역사의 개항기로 지목됩니다.
서양 선박들이 조선 근해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후반. 선조들은 이상하게 생긴 서양의 배를 '이양선'이라 불렸습니다.
열강의 함대는 통상 요구에만 그치지 않고 조선의 영토에 침입해 군사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지난 11일 수도권 최초 국립 해양문화시설인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개관식을 진행, 운영에 들어갔다.
(사진=뉴스토마토)
고종 12년,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본의 운요호 사건은 통상 수교거부 정책으로 대응하던 조선 수교의 문호를 열게 한 '을해왜요'로 불립니다.
조선침략의 서막은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강제한 인천의 해양 역사와 궤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뉴스토마토>가 수도권 유일의 해양박물관이 들어선 인천을 찾았을 때는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해양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관문이 된 인천항은 일본에 의해 수탈당한 만행의 역사와 근대의 물결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일본은 1876년 2월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강제한 후 침략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의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인천은 수도 한성의 외항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사실상 조선의 관문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굳게 닫힌 조선 관문이 열린 1883년 1월 뼈아픈 해양 역사를 고증합니다.
'어을미도' 그리고 인류의 '해양 역사'
디스코팡팡 등 대표적 놀거리가 있는 월미도에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들어선 배경은 개항의 역사와 무관치 않습니다.
1655년 '승정원일기'에 표기된 어을미도는 월미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바닷물이 섬을 타고 돌면서 섞이는 섬을 의미합니다.
개항 당시 제물포는 조수산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넓어 큰 배를 접안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물포 앞의 작은 섬 월미도는 만조 시 대형 선박의 입출항이 가능해 1918년 제물포 갑문이 설치되기 전까지 외국증기선들이 정박한 곳입니다.
증기선에 필요한 석탄 저장 시설이 들어서는 등 개항 후 각국 선박들이 한데 모이는 요충지가 됐습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어로활동을 하는 등 바닷가와 물길을 터 잡아 살아왔습니다.
전국 해안가에 분포하고 있는 조개무덤 등의 선사 유적을 통해 바다와 삶의 터전을 확인할 수 있고 해양문화의 계승은 바다를 건너 전파될 만큼, 때려야 땔 수 없는 인류의 보고입니다.
일본 해안 지역에서 출토된 한반도 계통의 선사 시대 유물들은 바다를 통한 교류의 흔적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가야는 건국 이래 서로 대립하거나 연합했고 중국·일본과의 갈등 관계 속에 성장해왔습니다.
삼국과 가야는 대외관계에 따라 바다를 통해 수군을 일으켰고 바닷길로 사신을 보내 친교를 맺는 등 선진 문물도 해양 역사의 한 획으로 지목됩니다.
또 삼국지에는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담겨 있는데, 주요 거점으로 변한 소국인 구야국을 알리고 있습니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했던 구야국은 남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중국 대륙 등을 잇는 삼한 해상교역의 단면입니다.
조선술·항해술의 발달로 보다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게 된 남북국 시대는 발해 무왕 때 서해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서 우수한 우리 수군의 운영 능력을 펼쳤습니다.
동양과 서양은 해양 실크로드로 연결됐고 신라의 청해진을 대표적 국제 교역항으로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축이 됐습니다.
지난 11일 수도권 최초 국립 해양문화시설인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개관식을 진행, 운영에 들어갔다.
(사진=뉴스토마토)
문순득 '표류기'…해양 중요성 계기
아울러 조선 후기 홍어 장수인 문순득이 바다를 표류하다 경험한 해외 여정 표류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802년 현 대흑산도 인근에서 표류해 오키나아와 필리핀 마카오를 거쳐 약 3년여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 일기는 19세기 초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구문화를 체험하는 등 이전의 표류인들과 큰 차별점을 두고 있습니다.
문순득이 표류기간 머물던 국제적 무역항들의 경험은 정약용, 정약전, 이강회 같은 실학자에게 전파됐다는 게 국립인천해양박물관 측의 설명입니다.
우동식 국립인천해양박물관장은 "정약용은 '경세유표', '사대고례'에 구체적으로 기록했으며 이강회는 문순득의 경험을 토대로 국내외 선박과 항해문화를 비교한 '운곡선설'을 집필했다"며 "정약용과 이강회를 통해 전파된 문순득의 표류 경험은 해양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이강회는 문순득의 사례를 통해 해양에 대한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됐고 선박에 대한 관심이 국가적 안위와 연결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실학자들에게 해상무역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줬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한정된 세계관이 당시 동남아 지역에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을 경험한 문순득의 이야기를 통해 서양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우 관장은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순득 일기'는 문순득의 표류 경험을 옮겨 적은 것으로 작성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아 현재 이를 밝히기 위한 조사연구 사업이 진행 중"이라며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전문가 평가에 따라 향후 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행정 절차를 추진하고자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동식 국립인천해양박물관장은 11일 인천 중구 월미도에서 열린 '국립인천해양박물관 개관식' 개회사를 통해 "해양도시 인천에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문을 열게 됨으로써 수도권 주민들도 해양문화와 유물을 가까이 직접 보고 경험하며 바다의 소중함을 느끼실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사진=국립인천해양박물관)
인천=이규하 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