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늦은 휴가를 내고 부모님과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오전 10시 출발하는 비행기였지만, 전날 출근길 폭설 예보가 있어 새벽 일찍부터 이동을 시작했는데요. 눈보라가 치는 날씨를 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이 생기긴 했지만 ‘별 일 있겠어’ 하고 공항버스 의자에 몸을 뉘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해 빠르게 수속을 마친 뒤 출발이 예정된 탑승구 앞에 앉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는데요. 탑승을 눈에 앞둔 두어 시간의 기다림 끝에 마음 속 한 켠에 자리했던 불안감은 결국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비행기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스크린에 ‘DELAY’ 표시만 점점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슬픈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듯이, 오매불망 기다렸던 내 비행기는 결국 오지 않았고, 항공사 안내에 따라 터미널 끝과 끝 수시로 변동된 탑승구만 왔다갔다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까요? 약속 시간에 오지 않는 그가 언제, 어디로 나올지 몰라 하염없이 기다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난달 27일 인천국제공항에 폭설이 내리고 있다.
(사진=배덕훈 기자)
오후 2시가 다 된 시간, 수차례 연착 이후 기다리던 그를 결국 마주했는데요. 기쁘기도 했지만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여행지 현지 이동 수단 등 (개인적으로 막대한 금액을) 선지불한 예약 일정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얼른 ‘날게 해주세요’ 기도를 했지만 역시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비행을 하기 전 ‘제방·빙’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제방빙 작업은 항공기 표면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서리, 얼음, 눈을 제거하고 발생을 방지하는 작업을 뜻합니다.
제방빙 작업장이 가득차 대기해야 한다는 기장의 수차례 안내방송에 부글부글 끓는 마음은 좀처럼 식지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방빙 작업 2순위였던 대기 순위는 어느새 말이 바뀌어 1시간 뒤 3순위가 되는 마법도 펼쳐졌습니다.
세상이 나를 ‘억까(억지로 까내린다는 은어)’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비행기가 공항을 빙빙 돌며 시간을 날려먹는 동안, 부푼 맘으로 계획을 짜며 예약한 돈도 허공으로 같이 날라갔습니다.
결국 탑승 후 수시간의 기다림 끝에 오후 5시경 비행기는 떴습니다.
현지 도착시 이미 저녁 시간으로 예약된 이동 수단이 없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10시간 가까이 억류돼 있던 공항을 벗어난 기분만으로도 기꺼웠습니다.
여기까지가 27일 폭설 당시 공항에 있었던 저의 표류기입니다.
하지만 뒤늦게 뉴스를 접해보니 더욱 심한 사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10시간이 넘는 기내 대기 시간을 거친 뒤 여행지로 떠난 승객도, 수시간을 기다렸음에도 결국 결항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승객도 있었습니다.
공항 곳곳도 승객들의 항의가 고성으로 번지며 아수라장으로 변하기도 했는데요. 폭설이 예상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이라고는 하지만 공항과 항공사의 대응이 안일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장시간 기내 대기를 하며 불편함을 호소했던 고령 승객도, 밤 늦은 시간 끝내 결항이 되자 집으로 돌아갈 차편도 끊긴 승객도 속속 나왔기 때문입니다.
폭설로 피해를 본 승객들의 분통이 채 가시기도 전인 29일 인천공항은 글로벌 메가 공항으로 도약한다고 밝히며 ‘인천공항 4단계 그랜드 오프닝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제2여객터미널이 기존의 2배 규모로 커지면서 연간 여객 5000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터미널 2개를 보유한 세계 3위 규모의 공항으로 거듭난다는 겁니다.
물론 예정된 행사로 취소나 연기를 하기는 어려웠겠지만, 폭설에 늦어진 제방빙 작업으로 승객들이 고통을 호소한 지 이틀만에 규모의 크기를 홍보하는 것에 씁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데요. 물론 여객처리 능력 등 규모도 중요하지만, 부족한 시스템을 보완하고 천재지변에도 승객들의 불편이 없도록 하는 내실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 더 우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