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은 '억울한 피해가 있으면 보상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 책임이 아니다" 혹은 "이미 보상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피해자 대부분은 이미 고령이거나 숨진 상태입니다.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3대에 걸쳐 이어져 온 호소는 역사 속에 묻히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5년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86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 약속에도…외면당한 '재산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2005년 3·1절 기념사에서 "한·일 협정과 피해보상 문제에 관해서는 정부도 부족함이 있었다"며 "정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는 베일에 싸여있던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된 직후였고, 이 협정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던 때였습니다.
이전까진 박정희정부가 어떤 명목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아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재협상'과 '개인 청구권 보상'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왔습니다.
'피해보상'을 내건 정부 대책기획단도 출범했습니다.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은 대통령 발언과 이런 사회 분위기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후 노무현정부는 특별법을 만들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6000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여기에도 '재산권'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57호 피해자들은 홀로 싸웠습니다.
미국에 진정서를 보냈고, 정부 부처와 은행에 민원을 제기했고, 헌법소원 심판까지 청구했습니다.
그러나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대일청구권 보상을 통해 이미 보상이 이뤄졌고, 워낙 오래전 일인 탓에 자료도 없다"는 겁니다.
사실상 미군정으로부터 이 돈을 이양받은 정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가상승률 10만배…보상은 고작 '30배'
지난 6일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을 만났습니다.
조 회장은 지난 2005년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을 도와, 이 문제를 공론화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정부는 피해자들이 다 죽길 바란다"며 "과거를 청산하고 싶은 의지 자체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어 "박정희정부는 일본에서 돈을 받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아무 관계없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국민을 입막음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가 '미군정 57호 강제예입금'을 유용하고 '생색내기용 보상'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 박정희정부가 한·일 회담에서 일본에 요구한 재산 청구권 8개 항목 어디에도 '미군정 57호'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정부는 '대일민간청구권신고법'에서 보상 대상의 1번째로 '미군정 57호 강제예입금'을 명시합니다.
결국 정부는 1975년 강제예입금 1엔당 30원의 비율로 보상했습니다.
피해자들이 미군정에 의해 재산을 강제로 예입해야 했던 때가 1946년이란 점을 감안하면, 30년 동안 물가가 30배 올랐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발간한 '숫자로 보는 광복 60년'에 따르면, 광복 이후 60년간 소비자물가는 11만배(연평균 21.3%), 생산자물가는 약 7만배(연평균 20.4%) 올랐습니다.
이를 두고 조 회장은 "1946년엔 1원과 1엔이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며 "이후 화폐단위가 평가절하된 점과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광복 당시 1엔은 현재 가치로 10만원에 이른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강제로 '은행에 예입하라' 해서 예입했는데,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지 못할망정 그걸 빼앗아 갔다"며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계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한편, 한국프로야구의 산파 역할을 한 원로 야구인 이호헌 씨도 30만엔이 넘는 이르는 일본은행권을 강제로 예입당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이씨는 지난 2012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지난 2006년 노 전 대통령에게 쓴 탄원서에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본다"며 "대통령님의 3·1절 기념식 말씀에 만사의 해결을 맡기고자 한다"고 적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