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직업 가운데 예로부터 기자만큼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이 없는데, 그 이유가 바로 기자의 무례함이다.
기자는 ‘대개’ 예의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를 겪어 본 사람들은 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게 다반사이고 주변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게 일상이다.
출입처에서 젊은 기자가 삼촌뻘 되는 나이의 취재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던지기도 한다.
오보나 악의적인 보도를 낸 뒤 연락이 두절돼 난감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기자 접대가 업무인 홍보담당자는,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유치원생 100명보다 기자 10명과 함께 다니는 게 더 힘든 일이라고 하소연한다.
아무 때나 제멋대로 투정을 부리거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직업적 무례함을 넘어 개인의 인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유가족들에게 저지른 무례한 언행은 시대의 멸칭 ‘기레기’를 낳았다.
도대체 어느 직업이 이렇게 ‘일상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무례할 수 있겠는가? 무슨 대단한 권력을 가졌기에 기자들은 무소불위 권력자처럼 제멋대로일까?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이것은 기자들의 ‘본성’이다.
19세기 프랑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발자크는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서’에서 제멋대로인 언론인의 본성을 소개한 바 있다.
예컨대 그는 이 보고서에서 “국회 출입기자는 의원을 성공시킬 수도 있고 그의 명성을 실추시킬 수도 있다”고 묘사했다.
그 때에도 기자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제멋대로의 본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자도 마찬가지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기자라는 직업을 얻게 된 순간 이들은 무례함을 훈련받음로써 비로소 ‘진짜 기자’로 태어난다.
무례함을 통해 자신이 기자임을 증명한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기자가 찾아 헤매는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흔히 권력에 의해 은폐되기 때문이다.
이런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려면 그 권력에 맞설 수 있는 무례할 정도의 당당함이 요구된다.
그래서 권력 앞에서 기자의 무례함은 인정된다는 것이다.
최근 기자의 무례함이 다시 화제가 됐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나온 출입기자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이 ‘무례한 질문’이라고 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부인 김건희 씨의 숱한 의혹과 추문에 관해 사과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왜 사과를 하는지 두루뭉술하게 말하고는 급기야 언론이 김건희 씨를 ‘악마화’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한 지역일간지 기자가 “사과를 할 때 꼭 갖춰야 할 요건 몇가지 있다, 어떤 부분에서 사과할지 명확히 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라면서 “국민들이 과연 대통령이 무엇에 대해 사과를 했는지 어리둥절해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보충설명을 해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어느 대목이 무례했을까? 150여년 전 발자크가 풍자한 기자의 ‘예의 없는’ 본성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이 정도 질문을 놓고 ‘무례한 기자’라고 비난한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발언은 여러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누가 누구에게 무례하다고 하는가’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며 언론은 발끈했다.
대통령실의 이 발언은 윤석열 정권의 언론관을 드러낸 것이다.
기자를 ‘애완견’으로,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데서 나온 것이다.
언론에도 문제가 있다.
그동안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공손하게 김치찌개나 받아먹고 전용기 셀카찍기만 하고 있었으니 권력자가 이 정도 질문에도 무례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기자들은 권력 앞에서만큼은 다시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
김성재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