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온기종기 모여든 세종 관가 주변 식당가에는 연일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던 탄핵 정국 입담이 공직사회의 메뉴가 된 건 탄핵 소추안 가결이후.
담론도 참 다양합니다.
"요즘 넷플릭스보다 탄핵관련 뉴스가 더 재밌다"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느 MZ세대 여직원은 "우린 1만원짜리 이하 영수증도 제출하는데, 확인되지 않는 특활비 깎았다고 반국가 세력…블랙코미디도 아니고"라고 합니다.
혹자는 "온통 탄핵 얘기만 있어 다른 볼거리가 없는 것도 윤건 탓"이라며 강철부대W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지만, 계엄군을 향한 시선은 달갑지 않습니다.
개병대를 싫어했는데 오히려 해병대 우승을 보고 눈물이 났다는 이도 있으니 이 무슨 상황적 아이러니인지. 구조적 아이러니인지.
여하튼 탄핵 정국관련 뉴스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고 더욱 알찬 일반기사를 <뉴스토마토>를 통해 볼 수 있으니 유료기사만큼은 찰나의 여유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해병대 신속대응부대가 상륙돌격장갑차(KAAV)를 이용해 해상 증원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사진=해병대사령부)
명실공히 <뉴스토마토프라임>인데 지식 습득 등 유용할 수 있는 대가적 가치에 무게를 둬봤습니다.
그래서 이번호는 지식스토리로 펼쳐보겠습니다.
앞서 거론했듯 해병대는 국가기동전략부대인 상륙군입니다.
특수부대가 어쩌고저쩌고 누가 세니 마니해도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는 상륙전은 적의 허를 찌르고 전세를 역전시켜 승리의 발판 마련합니다.
지상·공중·해상의 입체적 상륙훈련을 하는 이유도 바다부터 공중 어디든지 돌격할 수 있는 전천후 해병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죠.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군대 얘기가 아닌 해양의 중요성입니다.
우리 역사의 첫 국가를 말한다면 동아시아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지목합니다.
고조선 위로 중국, 아래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연안항로 길목의 중계무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삼한 해상 교역이자, 사회변화를 촉진한 성장 문물의 원동력입니다.
중국 제나라 문헌인 '관자'에는 문피(범가죽)를 고조선의 명산물로 꼽고 있습니다.
현 산둥반도에 위치했던 제나라가 고조선과 해상교역을 했을 것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천 영종도에 중국 화폐 오수전과 낙랑식 화살촉이 출토된 것도 중국과의 교역 항로 중간 기착지로 추정되는 해상 활동의 예죠.
삼국지를 보면 고조선의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해 이주, 한왕이 됐다는 구절은 해상 활동을 짐작케 합니다.
바다를 통해 세력을 떨친 건 고구려가 아닐까합니다.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만큼 우수한 해양력을 보유했던 시대였습니다.
즉, 우수한 해양력은 국력과 영토확대에 지대한 영향을 준 계기였죠.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의무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갈게 되었다.
..영락 6년,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담긴 구절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동원해 백제의 해양거점인 관미성을 함락시켰고 장수왕은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해로를 이용, 남중국의 송나라에 말 800필을 보낸 역사가 있습니다.
조운선과 판옥선을 비롯한 각종 배 6척의 색채화로 구성된 산박도로, 군선을 조운선으로 활용하는 목적의 각선도본. (사진=뉴스토마토)
동해안을 건너 일본과의 교류하던 고구려에 이어 한반도 동남해안으로 발전한 신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라가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해상 정책을 펼친 것을 부정할 순 없죠.
일본 고대 문화의 발상지인 이즈모에서 발견된 신라계 유물들은 신라가 일찍부터 바다를 건너 일본에 진출한 것을 말해줍니다.
지증왕 때는 군선을 제도화하는 등 수군 강화로 우산국을 정복했고 진평왕 때 국방 관서인 병부 산하에 선박 행정부서인 선부서를 뒀습니다.
문무왕 때는 선부서를 병부에서 분리해 선부를 설치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행정기관으로 불립니다.
9세기 압바스 조 궁정의 행정지리서인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는 "중국의 끝에 신라라는 황금이 많은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들어간 무슬림들은 그 땅의 쾌적함으로 인해 정착하고 절대로 그 곳을 떠나지 않는다"라며 "중국에서 동쪽에 있는 이 바다에서는 비단, 검, 우황, 사향, 알로에, 말 안장, 담비 가죽, 도기, 돛천, 계피, 겹작양이 온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또 바다를 통해 다양한 나라와 문화 교류를 펼친 가야는 더 넒은 세계와의 해상교류로 통합니다.
가양 건국 신화에는 김수로왕이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있죠.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에서는 유라시아 각지에서 생산된 유물이 발굴됐고 일본 고대 토기인 스에키가 가양 토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고증입니다.
특히 1863년 함열 현감 임교진이 12척의 조운선을 이끌고 익산 성당창에서 한양 경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조행일록>의 여정을 따라가면 조선 시대의 항해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1일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 독립의 외침은 육지에서뿐만 아니었습니다.
노동 착취와 임금 차별에 저항하며 노동쟁의를 일으킨 인천항 등 개항지의 항만노동자들의 울림을 기억해야합니다.
어부들은 일본 어민과의 차별과 어업활동 제한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 시위했고 1930~1932년 일본 상인이 제주 해산물을 부당하게 매입하자, 해녀들이 238회에 걸쳐 항쟁을 벌인 역사가 있습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절은 우리민족의 터전뿐만 아닌 빼앗긴 바다를 되찾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광복과 동시에 38도선 이남, 이북이 분할되는 비극을 써내려갔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후 해양국가의 기초인 항만 건설이 추진됐지만 1950년 발발한 6·25로 항만시설이 파괴됐고 종전 후 유엔, 국제기구 등의 도움으로 항만 시설을 복구하는 해운 항로 개척 역사는 뼈아픈 민족의 기억입니다.
바닷길은 선박을 이용해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해상운송이지만, 떨어진 대륙들을 이어주며 사회, 경제, 문화가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시작점입니다.
그러나 현시대는 수출입물류의 변화 속에 놓였습니다.
공급망 불확실시대, 물류의 재해석이 요구되는 국가의 명운 앞에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커녕 서슬퍼런 광기만 보이고 있으니 어찌 '손바닥 왕' 한심하지 않으리오.
지난 11일 부산 남구 신선대(사진 아래) 및 감만(위) 부두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
newstomato.com | 이규하 기자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던 탄핵 정국 입담이 공직사회의 메뉴가 된 건 탄핵 소추안 가결이후.
담론도 참 다양합니다.
"요즘 넷플릭스보다 탄핵관련 뉴스가 더 재밌다"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느 MZ세대 여직원은 "우린 1만원짜리 이하 영수증도 제출하는데, 확인되지 않는 특활비 깎았다고 반국가 세력…블랙코미디도 아니고"라고 합니다.
혹자는 "온통 탄핵 얘기만 있어 다른 볼거리가 없는 것도 윤건 탓"이라며 강철부대W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지만, 계엄군을 향한 시선은 달갑지 않습니다.
개병대를 싫어했는데 오히려 해병대 우승을 보고 눈물이 났다는 이도 있으니 이 무슨 상황적 아이러니인지. 구조적 아이러니인지.
여하튼 탄핵 정국관련 뉴스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고 더욱 알찬 일반기사를 <뉴스토마토>를 통해 볼 수 있으니 유료기사만큼은 찰나의 여유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해병대 신속대응부대가 상륙돌격장갑차(KAAV)를 이용해 해상 증원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사진=해병대사령부)
명실공히 <뉴스토마토프라임>인데 지식 습득 등 유용할 수 있는 대가적 가치에 무게를 둬봤습니다.
그래서 이번호는 지식스토리로 펼쳐보겠습니다.
앞서 거론했듯 해병대는 국가기동전략부대인 상륙군입니다.
특수부대가 어쩌고저쩌고 누가 세니 마니해도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는 상륙전은 적의 허를 찌르고 전세를 역전시켜 승리의 발판 마련합니다.
지상·공중·해상의 입체적 상륙훈련을 하는 이유도 바다부터 공중 어디든지 돌격할 수 있는 전천후 해병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죠.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군대 얘기가 아닌 해양의 중요성입니다.
우리 역사의 첫 국가를 말한다면 동아시아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지목합니다.
고조선 위로 중국, 아래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연안항로 길목의 중계무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삼한 해상 교역이자, 사회변화를 촉진한 성장 문물의 원동력입니다.
중국 제나라 문헌인 '관자'에는 문피(범가죽)를 고조선의 명산물로 꼽고 있습니다.
현 산둥반도에 위치했던 제나라가 고조선과 해상교역을 했을 것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천 영종도에 중국 화폐 오수전과 낙랑식 화살촉이 출토된 것도 중국과의 교역 항로 중간 기착지로 추정되는 해상 활동의 예죠.
삼국지를 보면 고조선의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해 이주, 한왕이 됐다는 구절은 해상 활동을 짐작케 합니다.
바다를 통해 세력을 떨친 건 고구려가 아닐까합니다.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만큼 우수한 해양력을 보유했던 시대였습니다.
즉, 우수한 해양력은 국력과 영토확대에 지대한 영향을 준 계기였죠.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의무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갈게 되었다.
..영락 6년,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담긴 구절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동원해 백제의 해양거점인 관미성을 함락시켰고 장수왕은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해로를 이용, 남중국의 송나라에 말 800필을 보낸 역사가 있습니다.
조운선과 판옥선을 비롯한 각종 배 6척의 색채화로 구성된 산박도로, 군선을 조운선으로 활용하는 목적의 각선도본. (사진=뉴스토마토)
동해안을 건너 일본과의 교류하던 고구려에 이어 한반도 동남해안으로 발전한 신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라가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해상 정책을 펼친 것을 부정할 순 없죠.
일본 고대 문화의 발상지인 이즈모에서 발견된 신라계 유물들은 신라가 일찍부터 바다를 건너 일본에 진출한 것을 말해줍니다.
지증왕 때는 군선을 제도화하는 등 수군 강화로 우산국을 정복했고 진평왕 때 국방 관서인 병부 산하에 선박 행정부서인 선부서를 뒀습니다.
문무왕 때는 선부서를 병부에서 분리해 선부를 설치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행정기관으로 불립니다.
9세기 압바스 조 궁정의 행정지리서인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는 "중국의 끝에 신라라는 황금이 많은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들어간 무슬림들은 그 땅의 쾌적함으로 인해 정착하고 절대로 그 곳을 떠나지 않는다"라며 "중국에서 동쪽에 있는 이 바다에서는 비단, 검, 우황, 사향, 알로에, 말 안장, 담비 가죽, 도기, 돛천, 계피, 겹작양이 온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또 바다를 통해 다양한 나라와 문화 교류를 펼친 가야는 더 넒은 세계와의 해상교류로 통합니다.
가양 건국 신화에는 김수로왕이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있죠.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에서는 유라시아 각지에서 생산된 유물이 발굴됐고 일본 고대 토기인 스에키가 가양 토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고증입니다.
특히 1863년 함열 현감 임교진이 12척의 조운선을 이끌고 익산 성당창에서 한양 경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조행일록>의 여정을 따라가면 조선 시대의 항해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1일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 독립의 외침은 육지에서뿐만 아니었습니다.
노동 착취와 임금 차별에 저항하며 노동쟁의를 일으킨 인천항 등 개항지의 항만노동자들의 울림을 기억해야합니다.
어부들은 일본 어민과의 차별과 어업활동 제한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 시위했고 1930~1932년 일본 상인이 제주 해산물을 부당하게 매입하자, 해녀들이 238회에 걸쳐 항쟁을 벌인 역사가 있습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절은 우리민족의 터전뿐만 아닌 빼앗긴 바다를 되찾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광복과 동시에 38도선 이남, 이북이 분할되는 비극을 써내려갔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후 해양국가의 기초인 항만 건설이 추진됐지만 1950년 발발한 6·25로 항만시설이 파괴됐고 종전 후 유엔, 국제기구 등의 도움으로 항만 시설을 복구하는 해운 항로 개척 역사는 뼈아픈 민족의 기억입니다.
바닷길은 선박을 이용해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해상운송이지만, 떨어진 대륙들을 이어주며 사회, 경제, 문화가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시작점입니다.
그러나 현시대는 수출입물류의 변화 속에 놓였습니다.
공급망 불확실시대, 물류의 재해석이 요구되는 국가의 명운 앞에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커녕 서슬퍼런 광기만 보이고 있으니 어찌 '손바닥 왕' 한심하지 않으리오.
지난 11일 부산 남구 신선대(사진 아래) 및 감만(위) 부두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