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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정치 (박창식의 K-국방)군대도 '시민사회 합의' 벗어나지 말아야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시)

 

국방부가 장병 정신전력 교재 개정판을 배포했다가 2만권 모두를 회수하는 일이 2023년 연말에 벌어졌습니다.

교재에서는 독도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영토분쟁이 있는 지역이라고 기술했습니다.

독도에는 영토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 공식 의견에서 벗어나, 독도 분쟁 지역화를 노리는 일본 의도에 맞춰 춤춘 꼴입니다.

 

364쪽 정신전력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습니다.

독도 관계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교재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혜안과 정치적 결단의 지도자"라고 묘사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과 잘못이 함께 있죠. 교재에서는 잘못은 쏙 빼놓고 공적만 기술합니다.

뉴라이트 계열 일부 역사학자들이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부각시키는 관점을 교재 집필자들이 빌어왔나요? 우리 역사학계는 이런 관점을 폭넓게 수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표현으로 이승만의 잘못을 명시해 왔습니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세력이 5공화국 헌법을 만들 때 이 표현을 한 차례 뺐죠. 국회가 1987년 6월 항쟁 뒤 개헌하면서 다시 살렸습니다.

국방부가 전두환 세력을 계승하겠다는 것으로 오해받지 말아야죠. 교재를 수정할 때 고치기 바랍니다.

 

교재에서는 국가관 항목에서 국가의 임무, 헌법 가치, 군대의 존재 이유 등을 죽 설명합니다.

  장병 교재는 쉬워야죠. 교재에서는 국가관을 설명하면서 추상적인 개념어휘를 기계적으로 병렬하거나 동어반복합니다.

어렵습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군은 오직 국가에 의해서만 존재 의의가 있다.

국가가 없으면 군대는 존재 목적을 잃는다.

국가가 없는 군대는 '무장세력'으로 전락한다" 무슨 말이죠?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대한제국 군인 상당수는 의병으로 전환해 국권 회복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분들은 무장세력으로 전락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인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발전했죠.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독립군과 광복군을 무장폭도라고 규정했습니다.

군대가 '무장세력으로 전락한다'와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밖에도 의문스러운 대목이 많습니다.

임진왜란 전후를 설명한 시각자료에는 1543년 중종 때 400만명이던 인구가 1639년(인조 17년)에 100여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표시했습니다.

전쟁 피해가 아무리 커도 인구가 300만명이나 줄까요?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전후에 호적부가 흩어지고 없어진 탓에 통계가 부정확해진 결과로 설명합니다.

 

교재는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법철학'이라는 책에서 "국민의 자유는 국가의 안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군대는 국민의 자유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서술했다고 적었습니다.

칸트는 법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적이 없습니다.

(위 두 사례는 <한국일보> 23년 12월28일)

 

고구려인의 상무정신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중국 역사서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은 남녀가 결혼하면 먼저 자신이 죽을 때 입을 수의를 만들어놓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이러한 특이한 풍습은 잦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을지 모를 정도로 긴박한 삶에서 나왔다"고 적었습니다.

고구려인이 결혼식 때 수의를 짓는 풍습이 상무정신의 발로인가, 아니면 부부가 죽어서도 함께 하자는 뜻인가? 기록이 부족하니 정확히 해석하기 어렵죠.

 

교재에서는 어떤 근거로 상무정신과 연결시켰을까요? 대학가 학습자료 업체 '해피 캠퍼스' 누리집에서 "고구려의 이러한 특이한 풍습은 잦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을지 모를 정도로 긴박한 삶에서 나왔다"는 문장이 토씨 한 자도 다르지 않게 등장함을 필자는 발견했습니다.

이 자료에는 작성자 이름도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1천원을 주고 내려받아 리포트에 인용하곤 하죠. 군대 주변에서 '썰'처럼 돌아다니는 내용을, 교재 집필자가 근거를 확인하지 않고 긁어다 붙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방부가 교재를 새로 만들 때 몇 가지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 표지. (사진=국방부 제공)

 

첫째, 정신교육 내용이 '시민사회 합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본부에 정신전력 담당 과를 두고 교재를 보급하며 교육 과정을 감독합니다.

정신전력 교재는 국가관, 대적관, 안보관 등으로 틀을 잡았습니다.

군대 고유 이념 체계를 세운다는 느낌을 줍니다.

 

미국 국방부는 정신전력 담당 부서를 두거나 정신전력 교재를 만들지 않습니다.

육해공군과 해병대가 군별 역사와 전통, 전투 교리, 안보정세 정도를 교육합니다.

군대가 별도로 이념 체계를 만들지 않아도, 학교 교육과 사회 활동을 통해 국가관, 역사관을 익힌 시민이 입대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겁니다.

 

한국군은 보병, 포병, 통신병 등 외에 공보정훈 병과를 두고 있습니다.

정훈은 정치훈련을 줄인 말입니다.

민주주의 국가 군대에서 정치훈련 병과를 두는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1940년대말 국공내전에서 이념 경쟁력이 부족해 패배했다고 판단한 대만군이 정치훈련 병과를 설치했고 한국군도 이를 본떴습니다.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 군대는 공보 업무 담당자만 둡니다.

군인 정신력의 원천으로 시민사회 합의를 활용합니다.

한국군이 국공내전 시절 모델로 21세기 한국 청년들의 정신을 교육할 수 있을까요?

 

시민사회 합의는 특별한 게 아닙니다.

헌법과 법률, 학교 교육 과정, 학계 연구 전통에 담겨있습니다.

이것을 존중하면 독도 관계나 이승만 정부 미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겁니다.

군의 특수성도 필요하지만, 시민사회 합의가 먼저입니다.

한국군은 헌법과 법률상 국민의 군대입니다.

 

둘째, 군의 정치 중립성을 지키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독일군은 히틀러 시절에 파시즘의 도구로 악용됐습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독일은 군대에 '제복 입은 시민' 개념을 도입합니다.

군대가 특정 이념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군인 교육에도 시민정치교육 관점을 적용합니다.

독일 시민정치교육에서는 논쟁이 벌어질 때 어느 한쪽을 택하거나 버리지 않고 공방 쟁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번 국방부 정신전력 교재에서는 문재인 정부 안보정책을 비판하고 윤석열 정부의 '힘에 의한 평화'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정당에 따라 안보정책이 다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권 정당 안보정책만을 골라 군인들한테 일방적으로 교육하는 일이 바람직한가요?

 

독일 같으면 여당과 야당 안보정책을 나란히 제시하고 장병들이 토론하도록 요구합니다.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하는 안보정책 사안을 장병교육에 끌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도 정당별로 다른 안보정책 사안을 군대 교육에서 어떻게 다룰까를 연구해봐야 합니다.

군의 정치 중립성과 군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졸속을 피하고 전문가를 활용하기 바랍니다.

 이번 교재는 김수광 국방부 정책기획관(육군 소장)을 비롯한 육군 장교 7명, 해군 중위 1명, 공군 대위 1명, 군무사무관 1명 등 모두 10명이 집필했습니다.

5년 전 개정판 작업 때는 대학교수 등 민간 전문가가 많이 참여했죠.

 

자문위원 명단을 보니 육해공군 해병대 공보정훈실장들이 죽 들어가 있습니다.

감수위원 명단에는 김수광 정책기획관 바로 아래 직위자인 정책기획차장(육군 준장)과 역시 군인인 국방정신전력원 교수들이 죽 들어가 있습니다.

 

경력과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아 놓으면 좋은 지식을 생산하기 어렵습니다.

수정 작업할 때는 집필진과 자문, 감수위원을 다시 선정하면 좋겠습니다.

민간 전문가도 활용하기 바랍니다.

졸속을 피해야지요.

 

■필자 소개 / 박창식 / 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위기관리와 소통, 말과 글로 행복해지는 기술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다.

 

newstomato.com | 한동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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