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로 할 수 있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나라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총칼 대신 말로 하는 민주주의를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수준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선진국 반열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것도 민주주의라는 기초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K팝 열풍 등 K문화가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것도 민주주의가 그 밑바탕이 됐기 때문에 벌어진 기적이었다.
그러나 지난 12월 3일 밤 10시 30분 우리는 보았다.
대통령이 TV에 나와 종북반국가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40년만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을.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총으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이 계엄령 해제 투표를 진행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모여 있던 국회 본관을 침탈한 것을.
이로써 ‘말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총칼의 시대’가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계엄령을 선포하는 대통령의 얼굴과 총을 든 공수대원의 군복에 5.16, 12.12, 5.18이 오버랩됐다.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 어떻게 이룬 선진국인데, 어떻게 이룬 K문화인데. 총알 한 방에 유리창처럼 깨질까봐 노심초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는 또 보았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수많은 시민들이 일제히 국회의사당에 모여 계엄령 해제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을, 190명 국회의원이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본관 의사당에 모여 공수대원 침탈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물리치고 계엄령 해제를 결의한 것을. 우리는 뜬 눈으로 지샌 새벽 보았다.
대통령이 패잔병의 얼굴로 마지 못해 계엄령 해제를 수용한 것을.
밤마다 국회의사당 앞은 계엄 반대와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한순간 ‘총칼의 시대’로 사라질 뻔했던 ‘말의 시대’를 되살리기 위해 인파가 몰려들고 몰려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공동체의 운명에는 아예 관심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한 것으로 기성세대가 낙인찍었던 MZ들이 몰려들더니, 어느새 시위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MZ들은 비장하고 고답적인 기성세대의 시위 문화를 단숨에 바꿔버렸다.
음악은 투쟁가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같은 K팝으로, 촛불은 아이돌 콘서트에 들고 갔던 응원봉으로, 깃발은 시민운동 노동운동 단체명에서 ‘전국 집에 누워 있기 연합’ 같은 재치 있는 이름으로 매일매일 대치되고 진화됐다.
이제 MZ는 참여하는 규모면이나 시위를 채우는 내용면에서 기성세대와는 뚜렷한 차이를 만들내며 신주류로 등장했다.
‘국민의 힘’의 탄핵 불참으로 대통령의 내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다시 ‘총칼의 시대’로 갈지, ‘말의 시대’를 온전히 회복할지도 불투명하다.
환율은 급등하고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국격은 추락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시대 무너졌던 한국 경제는 계엄령으로 결정적 상처를 입어 앞으로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몇 년이나 더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내란은 며칠 혹은 몇 달이겠지만 내란으로 인한 후유증은 몇 년, 몇 십 년에 걸쳐 우리를 고통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오롯이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듯싶다.
미래의 민주주의를 이끌어갈 MZ들이 새롭게 발견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성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말의 시대’를 만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엄숙주의보다 더 강한 것이 펀(Fun)이다.
일찍이 논어에서 공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자는 없다고 설파했다.
불행 가운데서도 기쁘고 설레는 일이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