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라 1946년 한국인들의 사유 재산이 몰수됐고, 그 피해자들이 10만명에 달했음에도 그동안 피해 보상에 대한 입법안은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1968년 피해자들에 대한 첫 보상법이 나왔지만 현실화되지 못했고, 이후 56년간 단 한 건의 피해 관련 보상 법안도 발의되지 않았는데요. 1974년 정부 차원에서 제정된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법안'에 담긴 보상액은 물가 상승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턱없이 적은 액수로 책정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의 공분만 샀습니다.
1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제헌 국회 이후 22대 국회까지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 보상에 대한 법안은 1968년 5월13일 당시 신민당의 정상구 의원이 발의한 대일 민간 청구권 특별보상 법안이 유일했습니다.
정상구 의원이 발의한 대일 민간 청구권 특별보상 법안 원문 내용. (사진=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물가상황 고려한 '첫 보상법'
정 의원의 법안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재원은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일본 측이 한국 정부에 건네준 3억달러의 무상 청구권 자금으로 정했는데요. 법안의 핵심은 보상 대상의 보상액 평가 비율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과거 피해를 당했을 시기를 고려해 물가 지수 비율을 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위원회를 설치하고 보상 지급에 특례를 둘 수 있는 조항을 신설했습니다.
여기에 기간 내 청구하지 않을 경우에는 청구권을 자동적으로 소멸시키도록 했습니다.
당시 정 의원은 법안 발의 배경에 대해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고, 국민과 통치자, 국민과 정부의 관계에서 불신을 막길 바란다"고 밝혔는데요. 국가가 보상을 해야 할 대상으로 8·15 광복 이전 일본 정부에 피해를 입은 국민들과 이후 미군정 때 법령 57호에 의해 피해를 본 국민들을 꼽았습니다.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법안의 발의 시기는 1965년 한일 협정 체결된 이후로, 당시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무상 3억달러를 10년에 나눠 3000만달러씩 받기로 했는데요, 박정희정부 때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 3억달러 전액을 보상액으로 규정한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1965년 당시 정부는 한·일 기본조약·청구권 협정에 따라 다음해인 1966년 청구권 자금 운용·관리 법안과 1971년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 법안, 1974년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법안을 잇따라 제정했는데요.
1975년에서 1977년까지 민간인 보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의 100%를 보상하지 않고, 피해액의 20분의 1인 5% 정도만 피해자들에게 지급했습니다.
나머지 95%는 경부 고속도로, 포항제철, 소양강댐 건설과 국가기간산업 육성, 농업·농촌 개발 등 정부가 경제 발전을 명분으로 한 관련 사업에 쓰였습니다.
당시 보상액은 피해자들이 1946년 일본은행권을 예입한 후 30년이 지나서야 보상이 진행됐기 때문에 과거 물가 상황을 감안하면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피해자들의 반발이 상당했는데요.
신정훈 국회 행안위원장이 11일 국회에서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 이어 국회마저 대책 '전무'
그러나 이후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 보상 입법안 발의와 보상 관련 정책은 전무했습니다.
피해자들이 10만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정부에 이어 국회의 무관심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실제 과거사 관련 법안에 나오는 주요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화운동 시기가 주를 이뤘는데요. 지난 5월10일 출범한 22대 국회에서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와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관련 법안이 각각 2건씩 발의됐습니다.
이 외에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피해자 구제, 제주4·3사건 진상규명·희생자 명예회복,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안 등이 나왔습니다.
정치권에선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 보상을 위해선 특별법 발의밖에 답이 없다고 하는데요. 다만 미군정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 부족과 피해 실태 조사가 면밀히 이뤄져 있지 않아 국회 차원의 대응책 마련도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특별법을 발의하든, 아니면 과거사법을 개정하든 미군정 시기 때까지 포함해서 다시 조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야 정부가 관련 조사를 할 수 있다"며 "법 개정이 없는 상태에선 피해 보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
newstomato.com | 박주용 기자
1968년 피해자들에 대한 첫 보상법이 나왔지만 현실화되지 못했고, 이후 56년간 단 한 건의 피해 관련 보상 법안도 발의되지 않았는데요. 1974년 정부 차원에서 제정된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법안'에 담긴 보상액은 물가 상승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턱없이 적은 액수로 책정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의 공분만 샀습니다.
1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제헌 국회 이후 22대 국회까지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 보상에 대한 법안은 1968년 5월13일 당시 신민당의 정상구 의원이 발의한 대일 민간 청구권 특별보상 법안이 유일했습니다.
정상구 의원이 발의한 대일 민간 청구권 특별보상 법안 원문 내용. (사진=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물가상황 고려한 '첫 보상법'
정 의원의 법안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재원은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일본 측이 한국 정부에 건네준 3억달러의 무상 청구권 자금으로 정했는데요. 법안의 핵심은 보상 대상의 보상액 평가 비율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과거 피해를 당했을 시기를 고려해 물가 지수 비율을 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위원회를 설치하고 보상 지급에 특례를 둘 수 있는 조항을 신설했습니다.
여기에 기간 내 청구하지 않을 경우에는 청구권을 자동적으로 소멸시키도록 했습니다.
당시 정 의원은 법안 발의 배경에 대해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고, 국민과 통치자, 국민과 정부의 관계에서 불신을 막길 바란다"고 밝혔는데요. 국가가 보상을 해야 할 대상으로 8·15 광복 이전 일본 정부에 피해를 입은 국민들과 이후 미군정 때 법령 57호에 의해 피해를 본 국민들을 꼽았습니다.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법안의 발의 시기는 1965년 한일 협정 체결된 이후로, 당시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무상 3억달러를 10년에 나눠 3000만달러씩 받기로 했는데요, 박정희정부 때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 3억달러 전액을 보상액으로 규정한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1965년 당시 정부는 한·일 기본조약·청구권 협정에 따라 다음해인 1966년 청구권 자금 운용·관리 법안과 1971년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 법안, 1974년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 법안을 잇따라 제정했는데요.
1975년에서 1977년까지 민간인 보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의 100%를 보상하지 않고, 피해액의 20분의 1인 5% 정도만 피해자들에게 지급했습니다.
나머지 95%는 경부 고속도로, 포항제철, 소양강댐 건설과 국가기간산업 육성, 농업·농촌 개발 등 정부가 경제 발전을 명분으로 한 관련 사업에 쓰였습니다.
당시 보상액은 피해자들이 1946년 일본은행권을 예입한 후 30년이 지나서야 보상이 진행됐기 때문에 과거 물가 상황을 감안하면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피해자들의 반발이 상당했는데요.
신정훈 국회 행안위원장이 11일 국회에서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 이어 국회마저 대책 '전무'
그러나 이후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 보상 입법안 발의와 보상 관련 정책은 전무했습니다.
피해자들이 10만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정부에 이어 국회의 무관심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실제 과거사 관련 법안에 나오는 주요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화운동 시기가 주를 이뤘는데요. 지난 5월10일 출범한 22대 국회에서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와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관련 법안이 각각 2건씩 발의됐습니다.
이 외에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피해자 구제, 제주4·3사건 진상규명·희생자 명예회복,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안 등이 나왔습니다.
정치권에선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 보상을 위해선 특별법 발의밖에 답이 없다고 하는데요. 다만 미군정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 부족과 피해 실태 조사가 면밀히 이뤄져 있지 않아 국회 차원의 대응책 마련도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특별법을 발의하든, 아니면 과거사법을 개정하든 미군정 시기 때까지 포함해서 다시 조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야 정부가 관련 조사를 할 수 있다"며 "법 개정이 없는 상태에선 피해 보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